성범죄 친고죄 폐지의 넛지(Nudge)(법률신문 2013. 5. 9.)

 

성범죄 친고죄 폐지의 넛지(Nudge)

      

 

                                                                                                            법률신문 2013-05-09

      

 

성범죄를 친고죄로 규정한 형법 조항이 삭제되면서 오는 6월부터 피해자의 고소 없이도 성범죄자를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베스트셀러인 경영학 도서 '넛지(Nudge)'는 '디폴트값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지는 운명'이라는 소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시카고 대학은 매년 11월에 '자유 등록기간'이 있어 이 기간 동안 교내 직원들은 의료보험이나 은퇴연금 같은 복리후생과 관련하여 자신이 택했던 조건을 온라인상에서 수정할 수 있다. 그런데 태만해서 또는 바빠서 등록을 하지 않는 직원들이 다수 있어서 바쁘거나 깜빡 잊는 직원들을 위해 어떠한 디폴트 옵션을 지정해 두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디폴트 옵션으로는 등록을 하지 않는 사람은 전년도에 그가 선택한 조건을 그대로 적용(현상유지 옵션)하거나 또는 선택조건을 '제로' 상태로 환원(제로 옵션)시키는 두 가지 방법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의료보험의 경우, 직원들은 제로 옵션(의료보험 혜택 없이 생활해야 한다)보다 현상유지 옵션(전년도와 동일한 조건 유지)을 훨씬 선호할 것이다. 따라서 제로 옵션으로 하는 경우 해당 프로그램에 대한 금액 납입이 의도치 않게 중단될 수 있으므로 전년도와 동일한 조건으로 하는 현상유지 옵션으로 바꾸는 것이 더 낫다.

 

위의 사례는 훌륭한 선택 설계의 기본적인 원칙 일부를 보여준다. 선택 설계자는 가급적 선택하는 사람들의 삶에 이로움이 더해지는 방안을 강구하기 위해 신경을 써야 한다. 선택하는 이들이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 주고 선택 설계자의(그리고 선택하는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잊어버리는 이들에게 부과되는 비용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넛지((Nudge)'의 저자들이 위와 같은 사례를 통해 주는 교훈은 우리 사회의 법률 환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성범죄를 개인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범죄로만 인식하였다. 성범죄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 자체가 피해자의 프라이버시에 큰 타격이라고 보는 사회적 관념이 팽배하여 성범죄를 친고죄로 규정한 것이다. 친고죄는 피해자 기타 법률이 정한 자의 고소가 있어야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범죄이다. 즉 선택 설계자인 입법자는 피해자의 행동(고소)이 없으면 수사기관이 범죄자를 처벌할 수 없도록 하는 옵션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형사소송법은 그 고소기간을 범인을 알게 된 날로부터 6개월로 상당히 짧게 규정하고 있어서 피해자가 성범죄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 가해자를 처벌하고자 할 때에 그 기간이 이미 지나버린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 사회에는 성범죄가 한 개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사회공동체 차원의 흉악범죄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이러한 인식을 반영하여 입법자는 피해자의 고소가 없어도 수사기관이 성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옵션으로 변경하였다.

 

'어느 성폭력 생존자의 빛나는 치유 일기'라는 부제를 가진 책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의 저자 은수연 씨는 조국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가해자를 고소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는 고통이라도 덜어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면서 성범죄를 비친고죄로 규정하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넛지(Nudge)는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는 뜻으로 강요에 의하지 않고 부드러운 개입을 통해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성범죄를 친고죄로 규정한 조항을 폐지하는 형법 개정의 '넛지(Nudge)'가 성범죄 근절에 유익한 기능을 하기를 기원한다.

      

https://www.lawtimes.co.kr/Legal-Info/Legal-Info-View?serial=74867 

성범죄 친고죄 폐지의 넛지(Nudge)